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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이집트는 말이죠….

“찬란한 고대 문명을 꽃피웠던 이집트가 지금은 왜 이렇게 낙후된 상태인가요?“
이와 같은 질문을 저는 자주 접합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런 질문을 던지는 분들은 거의 대체로 특정 연령대에 속해 있습니다. 그 세대가 겪었던 어떤 공통의 경험이 이 질문 뒤에 깔려 있는 인식의 체계가 형성되는데 영향을 끼친 것 같은데, 그것이 무엇인지 아직은 잘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저는 일단 ‘현대 이집트는 현대 이집트 자체’로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하는 입장입니다. 애초부터 ‘과거는 외국이다’라는 역사관을 제가 갖고 있을 뿐더러, 고대 이집트와 현대 이집트 사이에는 너무나도 커다란 시간의 간극과 너무 다양한 역사과정이 있기 때문이죠. 물론 현대 이집트를 현대 이집트 자체로 바라보면서 평가하는 경우에도, 그 평가를 위한 ‘준거가 되는 가치 기준’과 ‘비교의 대상’이 분명하게 설정되어야 할 것 같기는 합니다.
‘현대 이집트는 낙후된 곳’이라는 평가는, 대체로 '소위 서구적 스탠다드'라 할 수 있는 가치체계를 준거 틀로 삼고 있습니다. 더불어 그 평가가 이루어질 때 잠정적으로 설정되는 비교의 대상은, 평가의 주체가 한국 시민분들이라면, 자연스럽게 현대의 한국이 될 겁니다. 저는 이 서구적 스탠다드라는 준거틀과 현대 한국이라는 비교 대상을 사용하여 현대의 이집트를 평가하는 것이 과연 정당하고 적절한 것인가에 대해서 조금은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현대의 이집트는 1990년대 후반부터 비교적 꾸준하게 5% 가량의 경제 성장률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경제 규모 자체도 아프리카 55개국 가운데는 남아공, 나이지리아와 더불어 압도적이 비중을 차지할 정도이고요. 즉 이집트는 경제적으로는 소위 ‘아프리카 3대장’이라고 할 수 있는 국가죠.
그 이외에 평균수명이나 인구, 에너지 생산량 등도 꾸준히 늘어나고 있고, 유아-청소년 고용률, 영아 사망률 같은 지표들은 지속적으로 줄어들고 있습니다. 특히 인구 같은 경우는, 1990년대 초반부터 지금까지 대략 30년 동안 2배가 늘었을 정도입니다. 현대 이집트은 급격하게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매우 젊은 국가라고 할 수 있겠죠.
이집트의 경제적 통계는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GDP의 경우, 2022년 기준으로 이집트의 경제 규모는 전 세계 33위에 해당됩니다. 전 세계에 200여 개국이 있는 것을 감안한다면 오히려 상위권에 해당하는 수치죠. 물론 1인당 GDP의 순위는 116위로서 딱 중간 정도의 위치입니다. 참고로 2022년 기준 한국의 GDP 전 세계 13위, 1인당 GDP 30위입니다.
PPP, 즉 구매력 평가의 경우는 수치가 정말 놀랍습니다. 이집트의 PPP는 전 세계 18위 규모인데, 이는 한국(14위)과도 차이가 크게 나지 않는 순위죠. 당연히 1인당 PPP의 경우에는 이집트가 93위, 한국이 28위로 순위 차이가 좀 나기는 하지만요.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집트의 경제적 여건은, 그 비교의 대상이 서구권이나 한국이 아니라 전 세계 혹은 인근의 아프리카나 중동권 국가들이고 한다면 아주 나쁘지는 않은 상태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군사적으로도 이집트는 그 수준이 결코 낮지는 않습니다. 매년 발표되는 GFP 지수에 따르면 이집트의 군사력은 전 세계 14위 입니다. 이는 지역 내 군사 강국으로 자주 언급되는 터키(11위), 이란(17위), 이스라엘(18위)과 비슷하거나 오히려 더 높은 수준이죠. 즉 이집트보다 객관적인 전력이 분명하게 앞서는 국가는 미, 중, 러 같은 군사적 초강대국이나 한국, 일본, 프랑스, 이탈리아 같은 선진국들, 그리고 인도, 파키스탄 정도 밖에 없다고 할 수 있겠죠. 덧붙이자면, 최근 러시아와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도 군사력 지수가 이집트보다 떨어집니다.
또한 과거의 일이기는 하지만, 이집트에는 현대의 한국보다도 다양한 서구 문화가 훨씬 더 이른 시기부터 들어와 있었습니다. 예컨대,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초반에서 한국에 들어오기 시작했던 맥도날드나 KFC 같은 미국 계열의 프랜차이즈 체인들도 이집트에서는 1970년대부터 다 만나볼 수 있었습니다.
사실 이집트는 오래도록 중동권 문화의 중심지였고, 지금도 문화적 영향력은 매우 큰 편입니다. 영화의 경우에도 이집트에서는 19세기 후반부터 영화가 만들어지기 했고, 1940-1960년대에는 이집트 영화계가 ‘나일강의 헐리우드’라고 불릴 정도로 중흥기를 맞이 했었죠. 세계적으로도 유명세를 얻은, <닥터 지바고>나 <아라비아의 로렌스>에서 주연을 맡은 오마샤리프 같은 배우도 그때 헐리우드로 진출한 이집트 출신 배우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노벨상. 이집트 출신의 노벨상 수상자는 6명입니다. 그 가운데 평화상이 3명, 화학상이 2명, 그리고 문학상이 1명 있지요. 그 문학상의 수상자가 1988년 이 상을 수상한 세계적인 대문호, 나기브 마푸즈입니다. 마푸즈의 작품들은 오늘날에도 카이로 시내의 노점에서 아주 쉽게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그만큼 그가 이집트 시민들에게 여전히 사랑받고 있는 작가라는 이야기겠죠.
이런 사실관계들을 염두에 둔다면, 어쩌면 “찬란한 고대 문명을 꽃피웠던 이집트가 지금은 왜 이렇게 낙후된 상태인가요?“라는 질문은 아주 쉽게는 던져지지 않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까지 ‘이집트는 낙후된 곳’이라고, 직관에만 의지해서 간단하게 판단을 내렸던 분들이 있으시다면 한번 쯤은 다시 생각해 보시는 것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