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는 나와 분리되어 있다는 전제가 마련된 뒤에야 역사학은 시작될 수 있다. 물론 이런 나의 실존은 결국 과거와 완전히 분리되지 못하고, 과거는 일정 수준 이상으로 내게 종속되어 버린다. 하지만 역사학과 정치의 차별성은 처음부터 나와 과거를 연결 짓는 것이 아니라 나와 과거를 분리시키기 위한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인 끝에야 나와 과거의 연결성을 발견한다는 지점에 있다. "과거의 현재의 거울" 과 같은 경구로 시작되는 과거에 대한 탐구는 역사학의 가면을 쓰고 있는 유사 역사학 혹은 정치일 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역사학적 탐구가 그 탐구의 끝자락에서 겨우 전해주는 교훈은 과거가 현재와 얼마나 다르면서도 동시에 얼마나 비슷한지 뿐이다. 현재에 위치한 실존은 그때에 가서야 비로소 아주 자그마한 거울 한 조각을 얻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