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카를 데려온 이후
달라진 삶의 단면들에 대해
파카와의 10개월 하이라이트
지금, 여기 완벽한 행복의 순간들
파카를 처음 만나던 날, 한뼘 남짓한 조그마한 몸집의 녀석은 오래도록 내 눈을 빤히 쳐다봤다. 견사 사장님이 신기하다고 하실만큼. 그 순간의 여운은 아직까지도 진하게 남아있다. 그때 생각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줄게, 라고.
파카를 입양하고 나서 가장 크게 바뀐 것은 내가 나의 일상을 훨씬 좋아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자고 일어나서 나를 보고 반가움에 흔드는 꼬리. 부르면 달려오며 펄럭거리는 귀. 저녁에 침대에 누우면 슬며시 다가와 엉덩이를 붙이며 곁에 눕는 따스한 체온. 같은 곳을 향하며 중간 중간 눈맞춤을 하며 하는 산책까지. 대단하지도 특별하지도 않은 순간 순간들이 종종 완벽한 행복의 순간들이 되었다.
언젠가 강형욱 훈련사님이 반려견과 함께 하는 건 새로운 경험이자 삶의 확장이라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무슨 말인지 알 것도 같은 기분이다. 말이 통하지 않지만, 그 마음을 알 것 같은 느낌이 들 때. 그리고 나 역시 말을 하지 않았는데 파카가 내 의도를 알아차리고 어떤 행동을 할 때. 동물과 교감을 한다는 게 이런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파카가 오면서 나 스스로를 더 돌보게 되기도 했다. 더 규칙적으로 식사를 챙기게 되었고, 매일 한두번의 산책을 하게 되었다. 파카 덕분에 새로운 사람들과 조금 더 쉽게 대화하고 친해지기도 하고. 내가 어떤 모습이건 나를 무한히 신뢰하고 따르는 이 조그만 존재를 불안하게 만들기 싫다는 생각 때문에 예전 같으면 오래 가져갔을 부정적인 감정들을 꽤 빨리 끊어낼 수도 있게 되었다. 그러고보니 어떤 면에서는 조금 더 나은 인간이 된 것 같기도 하다. 지켜주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오히려 파카가 내 일상과 마음을 지켜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한 생명을 책임진다는 무게감
당연하게도 이 행복에는 책임이 따른다. 내가 이전까지 누리던 자유에 제약이 생긴 것인데 이를 테면 쉬는 날 하루종일 침대에만 박혀 움직이지 않는다거나, 파카가 가기 힘든 분위기 좋은 카페나 레스토랑, 전시회나 콘서트를 자주 간다거나 하는 자유는 상당 부분 포기해야 한다. 괜찮은 반려인이 되기 위해서는 끼니도 제때 챙겨줘야 하고 산책도 루틴하게 해야하니까. 도시에 사는 강아지는 혼자서 할 수 있는게 많지 않고 강아지의 하루는 우리의 일주일 정도니까. 일주일을 내내 외롭게 혹은 무료하게 보내게하는 건, 그리고 그런 일주일이 계속되는 건 결코 행복하다고 볼 수 없으니 말이다.
수고로워지는 것들도 많다. 파카와 동행하기 위해서는 갈 수 있는 곳들을 더 열심히 찾아야하고 비용도 더 들고 준비물도 많아진다. 갑작스런 지출도 각오해야 한다. 얼마 전 초콜릿을 조금 먹는 바람에 엑스레이를 찍었다가 생각지도 못하게 위 속에 뭔지 모를 물질이 꼬불꼬불 들어있었다. 그대로 두면 위벽이 얇아져서 구멍이 나거나, 길다란 이물이 장을 통과하다가 장이 아코디언처럼 꼬이면 장을 절제해야할 수도 있다고 했다. 내시경을 시도했다가 그걸로는 빼내기 어려워 결국 개복 수술을 했는데 파카는 파카대로 고생을 하고 내 지갑에선 하루 아침에 대략 300만원 정도가 빠져나갔다.
그뿐 아니다. 소소하지만 때로는 꽤 속상한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고 (강아지마다 다르기는 하겠지만 옷이나 가방이 뜯기는 건 일상다반사다.) 때로는 다치는 것도 감수해야 하고 (놀다보면 의도치 않게 깨물리는 경우가 있는데 소형견이라도 개 이빨은 날카로워서 꽤 아프게 상처가 난다.) 약간의 귀찮음도 간혹 감수해야 한다. (꼭 일이 바쁠 때 와서 칭얼거린다거나 왈왈 짖어대곤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보다 수명이 훨씬 짧은 이 작은 동물이 무지개 다리를 건너는 것까지도 지켜봐야 한다. 물론 이 모든 건 내가 행복하려고 이 녀석을 도시로 데려온 결과이니 그대로 수용해야한다. 그럴 각오로 데려왔다. 다만 각오를 해도 아픈 건 아프고 슬픈 건 슬플 것이다. 행복에는 댓가가 따른다.
나의 자유만큼 너의 자유도 소중하다
견주라는 말이 보호자로, 그리고 반려인으로 대체되는 추세다. 나도 역시 스스로를 반려인으로 정의한다. 그게 어떤 의미일까. 간혹 어떤 사람들은 강아지에게 공산품이나 물건에게 그러하듯 비싼 돈 내고 데려왔으니 내가 원하는 역할만 하기를 요구한다. 짖지도 말고, 떼 쓰지도 말고, 문제행동도 일으키지 말고, 얌전하게, 예쁘게 내가 원할 때 산책하고 내가 원할때 나에게 오고 안기라고 말이다.
사람에게 사람의 본성이 있듯이 개에게도 개의 본성이 있다. 사람이 원하는 자유가 있듯 개가 원하는 자유도 있을 터이다. 어떤 책에서 봤는지 퍼피클래스에서 들었는지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이런 이야기가 나의 마음에 깊게 남았다. 반려인이라면, 강아지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강아지에게 짖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뛰는 행동이나 깨무는 행동도 그렇고, 발에 흙이 묻어있는 것 또는 배변패드에 제대로 배변을 하지 못하는 것 역시 그러하다. 오히려 아예 짖지도 않고 매일 깨끗이 씻어대고 배변을 배변패드위에 정확하게 하는 것이 부자연스러운 일이라면 부자연스러운 일이다.
물론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는 규칙이 필요하다. 다만 그 규칙이 한 쪽을 너무 억압하기보다 적정선에서 조율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살아있는, 감정을 가진 생명이니까. 이웃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그리고 교육적으로 부정적인 효과를 낳지 않는 선에서는 조금 짖거나 내가 원치 않은 행동을 해도 어느 정도 수용해야한다는 생각이 든다. 반려인의 자유만큼 반려견의 자유도 중요하니까.